간증(치료받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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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간증] 수도생활 4년 소고(정찬균 목사) 조회수 : 1904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3-03-11
  사람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이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놓인 고통의 상황과 고통에 빠지게 된 원인에 따라서 각기 다르다. 그러나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도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꼭 가져야할 것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계속돼야 한다. 가장 큰 비극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고 절망에 빠지는 마음이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는 의지가 마음속에 있으면 더딜지라도 반드시 문제는 해결되고 고통은 극복이 된다. 신문에 광고하기를 경력 란에 해인사 수도생활 4년이라는 내용을 적었다. 어떤 분이 이 내용을 보고 불교를 폄하하려는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냐? 정말 수도생활을 한 것이 맞느냐? 법명이 무엇이냐? 라고 전화로 따지는 식의 통화를 했다고 한다.
  내가 신문에 광고를 내는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허덕이며 자기만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요 가족 이웃까지 고통스럽게 하며 건강한 사회를 어둡게 하는 것을 보면서 이들에게 소망과 기쁨을 주며 자유와 해방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특정 종교를 비방하거나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현재 목사의 위치에서 과거 수도생활을 말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을 말하는 이유는 나와 같은 고통을 지금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인 것이지 어느 특정 종교를 비방하거나 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글이란 것이 자세히 쓰려면 내용이 길어지고 요약하려면 내용이 부실해져서 어느 정도의 세밀한 내용을 전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는 비법인 사단을 설립하고 이미 목사의 직분을 약간 초월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 뿐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주고 해방과 자유를 주며 삶의 보람을 찾고 인생을 기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줘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일간지에 광고를 게재한 상태이기 때문에 나의 이 글은 사적이라기보다는 공적인 것이며 어느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요 현 사회의 불특정다수를 위한 것임을 밝힌다.
  내가 절에 들어가게 된 것은 건강문제로 인한 삶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었다. 두통, 불안, 불면증, 대인공포, 전신무력증, 이명, 정지된 감정상태, 통제가 불가능한 정서 등은 나를 절망에 빠지게 했다. 이런 상태로는 내가 원하는 공부도 할 수 없고 원하는 꿈도 이룰 수 없었다. 꿈이 사라진 이런 비참한 상태의 삶은 의미가 없고 살아야할 이유도 없다 끝내자 라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생을 마감 지으려하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면 죽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모든 문제가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인가? 그 뒤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인가? 현실의 고통은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지만 생을 마감한 후에 어떤 문제가 있고 고통이 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생을 마친다는 것은 컴컴한 동굴 속에 무엇이 있는가도 모른 체 혼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전혀 알 수 없는 내일을 막연한 짐작으로 간다는 것은 새로운 불안을 야기 시켰다. 지금 내가 겪는 고통은 아는 고통이지만 어떤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컴컴한 굴속에 혼자 들어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 점점 더 큰 부담과 불안으로 내 마음을 엄습해왔다. 그래서는 안 되겠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고민하는 나에게 주위에서 하는 말들이 한결같이 절에 들어가서 수양을 하라고 했다. 세상사는 것은 병든 마음에 세상 꼴 보기 싫어서 살기 싫고 죽자하니 컴컴한 동굴 속의 불안감에 잡히고 결국 세상도 안 보고 컴컴한 굴속에 들어가지도 않은 해법이 절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월출산 자락의 강진 무위사로 갔으나 절에서 못 볼꼴 보며 마음이 상해서 더 이상 머물 수 없는지라 선택한 것이 대한민국에서 제일 명찰로 알려진 합천 해인사였다. 누구의 소개도 없이 들어가니 반겨주지 않았다. 나는 당시 무위사에서 승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옷을 입은 채로 갔더니 행자승은 옷 입고 온 사람은 안 받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목표한 곳이 해인사였기 때문에 더 이상 다른 곳 갈 수도 없고 눌러 앉아서 사정하므로 겨우 해인사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수도생활은 나의 특별한 열심으로 인하여 주목을 받게 되었고 수행 처를 문경의 사불산 대승사로, 양산 통도사로, 영천 은혜사로 다시 합천 해인사로 운수납지가 되어 옮겨 다니며 하는 수행이 있었으나 4년여 대부분의 시간들을 해인사에서 보냈기에 경력 란에 모든 내용을 다 기록할 수 없는지라 그냥 해인사 수도생활 4년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해인사에서 행자시절에는 이지관 스님에게 초발심자경문과 치문을 배웠다. 이지관 스님은 내가 있을 당시 해인총림 강원 강사이셨지만 이후 동국대학교 총장과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조계종단의 학승 중에 최고의 존경받는 분이시다. 徐義現(본명徐黃龍)스님을 은사로 圓證이라는 法名을을 받고 해인사에서 사미십계와 부산 동래 범어사에서 比丘 250계를 받았다. 法名을 圓證이라 함은 고려말 공민왕의 스승이었던 고려 16國師 중의 한분인 圓證국사 法名을 따라 훌륭한 중이 되라고 은사님이 주신 法名이었다. 은사인 義現스님은 전두환씨 대통령시절 조계종 총무원장을 하시던 분이며 노태우씨 대통령 당선에도 불교계의 힘을 모아주던 총무원장이었으나 이후 장기집권에 따른 승려들의 난동으로 총무원장직에서 물러나고 초야에 계시는 분이다. 이분의 업적은 총무원장 10년 외에도 대구 동화사 70억 대불을 조성한 분으로 알려져 있고 10교구 본사인 영천 은해사 소유의 임야를 전 주지가 개인에게 매각해 버린 것을 재판을 통하여 소유권을 다시 회복시킨 것은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해낸 대단한 행정가로 종단에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은해사에서 사찰 총무가 되어 일을 총괄하다가 사찰 내 40여 명의 승려와 식솔들을 관리하는 과정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로 은해사 총무직을 버리고 다시 해인사로 가서 해인총림 선원에서 득도를 위한 참선공부에 매진하였다. 당시 해인사 주지스님은 指月스님이었고 총무는 도성스님, 교무는 보성스님이었다. 해인총림 방장은 성철스님이었고, 선원유나는 후에 종정에 오른 혜암스님이셨다. 당시 참선하면서 기억에 지금도 남아 있는 분은 일면스님이 있다. 성철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로 널리 알려지신 유명한 선승이요 혜암스님도 용맹정진에 일생을 보내신 선문의 대가이시다.
  절어 들어가서 보고 듣고 배우는 중에 견성성불하고 해탈하여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데 총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성불을 목표로 힘쓰게 되었다. 불가에서도 죄를 문제시 하였다. 가르침의 내용의 핵심은 해탈과 열반이었고 해탈과 열반을 위해서는 견성성불을 꼭 해야 했다. 나는 성질이 고지식해서인지 무엇을 공부하고 옳다고 믿으면 꼭 그대로 해야 하는 사람인지라 배운 지식을 실행하는데 힘을 다하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공부한 내용 중에 마음을 때리는 것은 반드시 견성성불 해야 하며 금생에 견성성불하지 못하면 물 한 방울도 먹을 자격이 없다 하고 죽어서는 살면서 절에서 먹고 살았던 쌀 한 톨이 천근의 무게가 되어 영혼을 누른다고 했다. 이런 내용들을 보면 절에 들어가서 수도한다고 하면서 도를 이루지 못하면 엄청난 죄만 짓고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또 한 가지 큰 문제는 금생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전생에 죄업이 많으면 성불할 수가 없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것이며 전생의 죄업과 이생에 지은 죄의 소멸을 위해서는 고행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는지라 고행을 하게 되었다. 고행은 힘든 일을 선택하여 일부러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가 회개하면 모든 죄를 사해주고 죄인이 죄 없는 의인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약속이 있는데 불교에는 그것이 없었다. 견성성불을 위해서 도를 이루는데 장애가 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선택한 고행이 추운 겨울 캄캄한 밤중에 얼음 물 속에 들어가서 안 죽을 만큼 견디다 나오는 것이었다.
  해인사에 가면 일주문이 있고 일주문을 통과하면 일반 학승들이 거처하는 요사 채와 창고 같은 것이 있고, 그 다음에 상당히 넓은 공간 일종의 운동장 같은 것이 있고, 그 위로 올라가면 큰 강당 일종의 식당 방 같은 곳과 부엌이 있고, 옆에 행자 승들의 거처가 있으며, 그 위에 대적광전 법당이 있고, 그 위에 팔만대장경 각이 있다. 부엌에 큰 물통이 있는데 윗 산골에 배관을 하여 절 부엌으로 물을 끌어들여서 해인사 식구들의 먹는 음식물을 만드는데 필요한 일을 하는 곳이다. 물이 이곳을 거쳐서 다음 아래 뜰로 내려가는데 그곳에 큰 돌로 만들어진 구유처럼 생긴 물통이 있고 그 물통에서 내려간 물이 하수구를 통하여 내려가게 된다. 나는 밤이면 후원에서 내려와 하수구로 가는 중간에 놓인 해인사 마당의 큰 돌 구유 같은 물통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자는 밤에 들어가서 하는 고행을 선택하여 모두 잠들고 있는 추운 겨울밤에 혼자 들어가서 죄가 없어져 속히 성불하기를 바라고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얼음이 꽁꽁 얼고 눈 내리는 겨울밤 모든 사람이 잠든 사이 옷을 벗고 물통 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 냉기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차갑고 고통스러웠다. 물속에서 그 추위를 견디면서 생각하는 것은 내 죄가 없어지겠지 죄가 얼마나 없어졌을까 모든 죄가 없어지고 내가 성불을 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뿐이었다. 살을 에는 겨울밤 추위의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꼭 신경 써야 하는 것이 고행을 해도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혹한의 겨울밤에 차가운 얼음 물속에 몸을 담그고 죄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시간을 가지면서 신경 쓰는 것은 몸이 얼어서 굳어 움직일 수 없기 전에 물속을 탈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행으로 죄업을 소멸하기 위하여 얼음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어도 도를 이루기 위한 목적 있는 행동인 것이지 죽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속에서 이를 측정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고 다리를 움직여 보다가 도저히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으면 물속에서 나와 옷을 입고 절 방의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참으로 묘한 것은 몸이 물속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물속에서 나와 따뜻한 방에 들어가면 뼛속이 더 아려오는 것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한 해 겨울을 이렇게 보내고 나니 그 다음 겨울에는 물속에 들어가는 것이 겁이나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이후에는 의도적으로 겨울이면 불안 땐 방에서 생활하면서 고행을 하고 외에 봄, 가을에는 거의가 밤이면 바위에 앉아서 밤을 보내기 일쑤였다.
  여름철 하안거 기간에 성철스님의 법문을 듣고 또 다른 도전을 하기도 했다. 법문에서 말씀하시기를 도를 이루는데 제일 장애가 되는 것이 잠 마귀이니 잠을 안자면 도를 빨리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을 안자기로 결심하고 잠 안자기를 시작했다. 놀라운 사실은 잠을 안자기 위해서 애쓰니 잠이 더 많이 왔다. 잠을 안자기 위해서 눈에 다 힘을 줘야하고 모두 잠자는 시간에 이슬 내리는 바위 위에 앉아서 모기와 싸우며 밤을 보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지만 그때는 대단한 결심으로 성불의 꿈을 안고 이 잠 안자는 일에 전념했다. 이렇게 잠 안자기를 14일째 되는 날 나는 평소와 다른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얼굴이 무거워지고 눈이 잘 떠지지를 않았다. 왜 그런지 궁금하여 거울을 보니 얼굴이 얻어맞은 것처럼 시퍼렇게 부어있었다. 잠을 안자면 도를 빨리 이룰 수 있다 하여 잠 안자기를 14일째 하니 도는 안 틔고 오히려 얼굴이 무겁게 부어오르는 것이었다. 성철스님의 법문 말씀과 다른 결과에 대하여 답을 얻고 싶어서 성철스님에게 알현을 요청하였다. 한번 만나려면 절을 3,000배하고 와야 만나주시는 분이신데 특별히 승낙해주셨다. 나는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이유를 물었더니 묻는 말에는 대답 없이 ‘가 자빠져 자라’하는 것이었다. 나는 스님의 방을 나와서 잠을 자기 시작하여 근 3일을 자고 나니 얼굴에 부기가 빠지고 회복이 되었다. 이후로 다시 선택적 고행은 도를 이루기 위하여 계속되었다.
  이렇게 해서 4년여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힘의 한계를 느끼며 내가 쓰러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에 냉이 들어서 여름철에도 찬물로 머리를 감을 수 없었고 솜이불을 덮어야 잠을 잘 수 있었으며 뼛속이 아려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정신적 고통으로 시작한 수도생활은 이제 육신이 망가져 죽음을 염려하는 상황이 되었다. 성불에 대한 확신은 사라지고 매일같이 아려오는 뼛속의 고통과 가을부터 몸이 얼어붙은 사람처럼 퍼렇게 되며 이제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절망감속에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무엇인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주위의 승려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보약을 먹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보약을 먹기 위해서 약값을 타러 서울 조계사 주지로 있는 은사스님에게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해인사를 출발하였다. 해인사에서 버스를 타고 대구로 나왔는데 대구에서 심적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절간 법으로 맺어진 사제지간인데 내가 가서 약값을 얻기 위해서 손을 벌린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못할 것 같았다. 평소 성질이 남을 도와주는 것은 좋아하지만 신세지는 것은 절대로 싫어하는 성격인지라 아무래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심하던 나는 4년 몇 개월이 지난날에 고향 가는 버스에 올라 4년이 넘는 수도생활을 마감 짓게 되었다.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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